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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최신 순 1화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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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악연 (1편) 악연 (1편)
201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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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악연 (1편) 악연 (1편)
201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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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악연 (2편) 악연 (1편)
201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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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악연 (1편) 악연 (1편)
201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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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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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법대 졸업식! 그날은 따뜻한 햇살이 내리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대학 켐프서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고 졸업이라는 의미보다는 지긋지긋한 공부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이 교정 전체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법대생 도혼마는 법대 강의실을 나서며 조용히 텅 빈 강의실을 바라봤다. 항상 학생들로 북적이었던 강의실이 아무도 없는 너무도 썰렁한 모습이 낯설었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한적한 것이 정상처럼 느껴졌다. 혼마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일어섰다. 그리고 강의실을 한번 휙 둘러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서울법대 졸업식! 그날은 따뜻한 햇살이 내리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대학 켐프서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고 졸업이라는 의미보다는 지긋지긋한 공부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이 교정 전체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법대생 도혼마는 법대 강의실을 나서며 조용히 텅 빈 강의실을 바라봤다. 항상 학생들로 북적이었던 강의실이 아무도 없는 너무도 썰렁한 모습이 낯설었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한적한 것이 정상처럼 느껴졌다. 혼마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일어섰다. 그리고 강의실을 한번 휙 둘러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의 앞에 같은 과 동창인 민규가 웃으며 서 있었다. “막상 졸업하니까 섭섭한 거야? 어째 얼굴이 밝지가 않네?” 혼마는 씩 웃으며 팔을 내밀어 민규의 어깨를 감쌌다. “어머니가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신데. 그러니 내가 어떻게 밝을 수가 있겠어?” “아니 왜? 기상이 나빠 나오시지 못하는 거야? 갑자기 왜?” “아니야. 몸이 편찮으신가 봐. 백령도에서 배를 타고 나오시기엔 무린가 봐.” 혼마는 씁쓸하게 웃으며 무거운 발을 옮겼다. “졸업식에도 참석하시지 못하는 것으로 봐선 많이 편찮으신 모양이지? 얼마나 기다렸던 졸업식인데 어지간하시면 나오실 탠데 말이야.” “그런 모양이야. 전화로는 심하지 않아도 하지만 많이 편찮은 게 맞는 것 같아!” 혼마는 애써 표정을 편하게 하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민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별일 없을 거야.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고 백령도잖아. 지난여름에 나도 백령도에 들어갔다가 멀미 때문에 죽다가 살았었는데 어머니께서야 연세가 있으신데 더 심하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해.” 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역시 개운치는 않았다. 졸업식이 열리는 학생회관에는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졸업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있고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끝이지 않았다. 서울법대의 가장 유명한 종 앞에는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느라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혼마는 학사모를 단정하게 쓰고 학생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회관 안은 이미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앞줄에 길게 졸업생들 자리가 있었고 학사모를 쓴 졸업생들이 각기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혼마는 법대생들의 자리로 다가갔다. 동기생들이 일제히 혼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서와! 수석 졸업생이 가장 앞에 앉아야지!” 동기생인 철기가 혼마의 손을 잡고 가장 앞자리를 가리키며 혼마의 자리를 만들어줬다. “대법원장 상을 받는다지? 축하해!” 여기저기에서 혼마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혼마는 웃으며 동기들과 악수를 했고 곧이어 단상에서 스피커를 통해 누군가 혼마를 불렀다. 단상에는 이미 총장을 비롯한 교수들과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혼마가 단상 가까이 다가가자 법대 주임교수인 윤창길 교수가 환하게 웃으며 혼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졸업을 축하하네! 아울러 대법원장 상을 받게 된 것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허허허! 자넨 검사를 지원 한다고 했지? 그럼 이젠 사법 연수원으로 들어가는가?” “예! 연수원을 마치면 검사를 지원할 겁니다.” “그런가? 검찰에는 자네 같은 유망한 인재가 필요하지! 축하하네!” 윤 교수가 혼마의 손을 굳게 잡고 흔들었다. 곧이어 졸업식이 거행됐고 식순에 따라 혼마는 졸업생을 대표하여 대법원장 상을 받았다. 축하 인사와 함께 포상을 받고 단상에서 내려오자 졸업생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혼마는 즐겁지가 않았다. 그것은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인 가족인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졸업식은 식순에 따라 차질 없이 진행됐고 그렇게 졸업식은 끝이 났다. “자! 축하주 한 잔 해야지?” 민규가 혼마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너 가족들이 모두 모였는데 오늘은 가족과 함께 보내지 그래?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무슨 말이야? 우리 가족이야 매일 보는 건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그러지 말고 오늘 우리 나이트클럽 가자! 강남에 물 좋은 곳 아는 곳이 있어.” “후후! 됐어. 난 가볼 곳이 있어. 그러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식구들과 같이 보네.” 혼마는 민규를 돌려 보네고 혼자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민규가 못내 서운한 얼굴로 봤지만 혼마는 억지로 웃음을 보내곤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교내를 벗어나 신림역 방향으로 달렸다. 혼마는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신호가 갔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혼마는 다시 번호를 누르고 기다렸지만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득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지금까지 그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혼마의 전화를 받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 같은 날 더구나 손꼽아 기다리던 혼마의 대망의 졸업식 날에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보통의 일은 아니었다. “뭔 일이지? 왜 전화를 받지 않는 거야?” 혼마는 불안함에 다시 다른 번호를 눌렀다. 동네 이장인 최 씨 아저씨의 번호였다. “아저씨! 저 혼마에요. 다름이 아니고 우리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아저씨에게 걸었어요. 혹시 우리 엄마 가까이 계세요?” “그, 그게 저…….” 그러자 최 씨 아저씨가 잠시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혼마는 갑자기 머릿속이 어지럽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어요? 예? 아저씨?” “그, 그게……노, 놀라지 마라. 사실은 아주머니가! 아주머니가 그만…….” “왜?……왜, 왜 그러세요? 왜 그러세요. 아저씨?” “호, 혼마야! 아, 아주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어! 나도 하도 어이가 없고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호, 혼마야!” “네? 그, 그게 무슨……도, 돌아가시다니요? 엄마가 말입니까? 엄마가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혼마는 그만 자신이 버스 안이란 사실도 잊어버리고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버스에 탄 승객들이 모두 혼마를 쳐다봤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엄마가 돌아가시다니요? 아, 아저씨! 지금 저하고 농담 하시는 거지요? 그렇지요?” “미, 미안하다! 혼마야! 내가 너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다! 미, 미안하다. 혼마야!” “노, 농담이지요? 그렇지요?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혼마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전화기를 귀에 대고 소리를 내질렀다. 최 씨 아저씨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니야!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얼마나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를 기다리셨는데 오, 오늘 졸업식을 하는 오늘 돌아가시다니! 그, 그게 말이 돠요? 그게 말이 되냐고요!” 혼마가 고통스런 비명을 내질렀다.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고 혀가 안으로 말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미, 미안하다! 혼마야! 정말 미안하다!” 최 씨 아저씨가 통곡을 하고 있었다. 혼마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어, 어떻게! 어떻게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어, 어떻게…….” “나, 나도 모르겠다! 나도 요즘 한참 꽃게 철이라 다들 정신들이 없는데 아주머니께서 너 졸업식에 간다며 며칠 전부터 들떠 있었는데 오늘 아침 갑자기 심장 발작을 일으켜 그만…….” 혼마는 정신없이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지나가던 택시를 잡았다. “아저씨! 인천 연안부두요! 빨리요!” 혼마는 택시 기사에게 소리치고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 엄마!’ 혼마는 흔들리는 몸을 겨우 중심을 잡았다. 자신이 흔들리는지 택시가 흔들리고 있는 건지 분간도 가지 않았고 뚜렷하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막연하게 앞이 캄캄해지고 막히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홰야 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무턱대고 빨리 백령도로 들어가서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여야만 할 것 같았다. 어떻게 연안부투에 도착했는지 어떻게 배표를 끊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혼마가 자그마치 여덟 시간동안 연안부투에서 배를 타고 백령도로 향하는 순간에 계속 눈물만이 앞을 가렸다는 것이었다. 전혀 예고도 없이 그렇게 어머니는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 어떻게 장례를 치렀는지 정신이 없을 정도로 혼마는 자기 정신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그를 맞이했고 백령도 주민 대부분이 갑작스런 혼마의 어머니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어쩌지 못하였다. 혼마가 사법고시에 합격해 온 동네에 잔치를 벌였던 것이 발과 오 개월 전이었는데 느닷없이 아들이 검사가 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하직하고 말은 것이다. 혼마는 오천 명이 채 되지 않는 백령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이었다. 혼마가 서울법대에 합격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백령도가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라며 섬 전체가 떠들썩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자 백령도는 그야말로 섬 전체가 축제분위기였고 졸지에 혼마와 그의 어머니는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만 것이다. 사실 혼마는 자신이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그 내막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았었다. 소위 말하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는 유복자인 것이다. 어머니가 백령도에 언제 무슨 연유로 들어왔는지는 혼마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누구도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어머니가 배가 불러서 혈혈단신으로 백령도로 들어왔고 그래서 혼마가 태어났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성이 도 씨라는 것도 어머니의 성 씨를 따서 도 씨가 된 것이었고 자라면서 단 한 번도 자신에 아버지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었다. 물론 어머니도 철저하게 아버지에 관한 것은 입을 다물었고 혼마 자신도 어머니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었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와 혼마 사이에 물어보지 말아야 할 불문열의 암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혼마가 지금까지 그의 어머니에게 단 한 번 아버지에 관한 언급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절대로 아버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도 말고 알아서도 안 된다는 한마디였다. 그것이 모두였다. 더는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리고 혼마 역시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 원인은 오직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오자 낡고 허름한 을씨년스러운 집은 그야말로 슬픔 그 자체였다. 혼마는 그만 방 한쪽 모퉁이에 무릎을 꿇고 울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도무지 어머니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고 문득 이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모두가 거짓 같고 당장이라도 지금까지의 모두가 한바탕 스쳐가는 바람과도 같은 것이라고 억지로 자책하기도 했다. 혼마는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앉아 멍하니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대 방문이 열리며 민규가 들어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민규가 혼마의 뒤를 이어 백령도로 들어왔고 민규가 혼마를 대신해 모든 장례절차를 주도했던 것이다. “이젠 정신 차려. 어머니께서도 네가 이렇게 정신을 놓고 슬퍼하는 것은 바라지 않을 거야. 곧 있을 연수원 입소식을 생각해야지!” 민규가 혼마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혼마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뭘 좀 먹자. 며칠 동안 너 너무 먹지 않았어.” 민규가 혼마에게 불쑥 죽을 내밀었다. “이장님이 너 먹이라고 죽을 주셨어. 전복죽이니까 우선 요기부터 해.” 혼마는 민규가 내민 전복죽을 간신히 조금 입으로 넣었다. 하지만 입안이 까칠해서 도저히 목으로 넘기기가 어려웠다. “억지로라도 먹어! 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 놈이야. 여기서 이렇게 주저 않을 거야?” 민규가 수저를 들고 강제로 혼마에게 내밀었다. 혼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전복죽을 입 속으로 넣었다. 그렇게 겨우 죽 한 그릇을 모두 비웠다. 내일이면 다시 육지로 나가야 한다는 관박감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혼마는 장롱을 열었다. 어머니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어머니께서 애지중지한 물건들이 장롱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또 다시 눈물이 쏟아졌고 겨우 진정하며 장롱 속의 물건들을 차곡차곡 살피기 시작했다. 손때가 묻은 낡은 플라스틱 상자 속에는 집문서와 땅문서가 나왔다. 어머니께서 혼자 고생하며 겨우 마련한 집이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샀던 기록들이었다. 그 땅을 사던 날 기뻐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혼마는 다시 목이 멨다. 그때였다. 집문서 사이에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날고 색이 바란 오래된 사진 한 장이었다. 혼마는 무심코 사진을 들고 쳐다봤다.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이었다. 앳된 단발머리의 엄마가 건장한 남자와 함께 다정스럽게 어깨를 감싸고 사진 속에 웃고 있었다. 혼마는 그만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사진 속의 남자는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진의 남자는 혼마와 너무도 흡사하게 닮은 혼마 자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흡사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혼마는 순간적으로 이 사진 속의 남자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란 생각을 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마치 고압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혼마의 시선은 사진 속의 남자에게 고정됐고 그리고 이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동공이 커졌다. “이, 이 사람은……이 사람이 아, 아버지!” 그것은 감출 수 없는 진실이었다. 첫눈에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혼마와 너무도 흡사한 용모의 남자는 아무리 부인을 해도 혼마와는 부자지간이라고 정확하게 증언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사진 뒤에는 어머니의 필체로 이름이 써져 있었다. (윤동현! 그리운 이름이여……) 혼마는 윤동현이라는 이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윤동현!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깊숙이 각인이 되어 영원히 잊히지 않을 이름이었다. 혼마는 사진을 자신의 다이어리 속에 끼어 넣었다. 사진과 이름이 있다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사진 속의 인물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세상에 홀로되었다는 아픔 속에 어쩌면 또 다시 어머니를 대신할 누군가를 찾고 싶은 심정이었는지도 몰랐다. 절박하게 외톨이란 관념 속에 아버지란 이름으로 누군가 대신 채워 줄 것을 바랐는지도 몰랐다. 그야말로 아무런 조건도 없이 말이다. * 일 년 후. 혼마는 사법연수원을 수료 후 서울지방 검찰청 북부지원에 배속되었다. 초임 검사로 매일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쯤 잊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동부 간선도로 위에서 발생한 뺑소니 사건이었다. 이른 새벽에 동부간선도로 위에서 붉은 색 외제 스포츠카가 질주를 하다가 술에 취한 취객을 치인 후 도주한 사건이었다. 사람이 다닐 수 없는 동부간선도로 위를 술에 취한 취객이 건너간 것이 사고의 원인이었지만 문제는 사람을 치어 놓고 스포츠카가 도주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문제의 사건 현장이 고스란히 동부간선도로를 감시하는 CCTV에 찍혔고 스포츠카는 차량 넘버까지 정확하게 보일 정도로 CCTV에 나타났다. 곧 사고차량이 수배됐고 뒤를 이어 차량의 소유주가 밝혀졌는데 스포츠카의 주인은 국내 굴지의 재벌회사인 신영그룹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다. 신영그룹 오너의 손자인 윤재형이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즉시 수사관이 윤재형을 체포하기에 이르렀고 윤재형은 경찰에 체포되어 검찰에 송치되어 온 것이었다. 그리고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은 윤재형의 작은 아버지가 바로 윤동현이란 사실이었다. 윤동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던 윤동현이란 이름이 윤재형의 가족 명단에서 발견 했을 때 혼마는 심장이 멈춰지는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동명이인이 아닐까 했었는데 어렵게 구한 신영그룹의 가족사진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윤동현모습을 보고서는 착각이 아님을 알았다. 거기에는 젊은 혼마의 모습과 흡사한 윤동현이 환하게 웃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혼마는 일어서 취조실로 들어갔다. 취조실에는 변호사를 대동한 윤재형이 불안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사람을 치고도 왜 도주했어요? 술 마시고 운전 했었어요?” 혼마는 윤재형의 맞은편에 앉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아, 아닙니다! 전 정말 사람이 치었는지 몰랐습니다! 다, 다만 물컹한 것이 부딪치는 느낌을 받긴 했었지만 그곳은 사람이 왕래할 수가 없는 도로고 해서 설마하니 사람이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 정말입니다!” 윤재형이 핏대를 올리며 항변을 했다. 변호사도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그럼 내려서 확인도 해보지 않고 그대로 도주했으면서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당신 말대로 짐승이라고 해도 내려서 확인은 해봐야 할 것 아닙니까?” “그, 그러려고 했었지요! 하지만 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고속도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달렸던 겁니다!” 윤재형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하고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죽은 사람 가족에게는 원하는 만큼 피해 보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적당히 수습 합시다. 서로가 제수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니까 선처를 부탁하겠습니다! 검사님!” 그러나 윤재형은 말과는 달리 있는 자의 오만이 가득했다. 혼마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간신히 참고 윤재형을 노려봤다. 변호사가 이미 사망자의 가족과 합의된 합의서를 제출했다. 어느새 사망자의 가족들에게 합의를 이뤄내서는 합의서까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보나마나 거금의 합의금이 건네진 것이 틀림없었다. 혼마는 윤재형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은 사람을 치어놓고 도주한 사람이야! 도로교통법 및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5조에 해당한단 말이야! 알겠어?” “아, 아니지요! 전 정말 사람이 치어 죽었는지 몰랐단 말입니다! 거긴 사람이 다닐 수 없는 자동차 전용 도로가 아닙니까?” 윤재형이 완강하게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혼마는 냉정하고 냉철했다. “뭐라고? 사람이 죽었는지 몰랐다고? 당신 CCTV로 확인해보면 사고가 나고 100M쯤 가서 멈췄어! 그리고 뒤를 확인하고 있는 장면이 찍혔단 말이야. 그런데도 아니라고 할 참이야?” “그, 그야 물컹한 것을 느꼈기에 멈춘 것이고 정말 그것이 사람이라곤 생각지 않았단 말입니다! 정말입니다!” 윤재형이 끝까지 자신은 사람을 치었는지 몰랐다고 발뺌을 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결국 윤재형은 도로교통법 위반 및 가중처벌에 관한 위반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하지만 영장은 기각되고 말았다. 도주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는 법원의 해명이었고 이미 사망자의 가족이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진정서를 법원에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윤재형은 불구속으로 기소되었고 구속에서 풀려나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모두가 유형무죄 무형 유죄였던 것이다. 그러나 혼마는 솔직히 윤재형의 도로교통법 위반은 별 관심도 없었다. 그의 관심은 바로 신영그룹의 윤여몽 회장의 셋째 아들인 윤동현이었다. 그날 이후 혼마는 윤동현에 관한 모든 재료들을 검색했고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바로 혼마의 출생의 비밀이었다. 윤동현은 천하의 바람둥이였고 그를 거쳐 간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란 점과 그것은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영그룹에서도 윤동현은 이미 내어놓은 자식이었고 특히 윤여몽 회장은 윤동현을 자식이 아닌 원수처럼 여기는 절대로 좋아질 수 없는 사이였던 것이다. 결국 혼마는 무슨 사연에 의해 세상에 태어났는지가 아닌 윤동현이 장난삼아 내질러 놓은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할 쓸데없는 부산물에 불과 하였던 것이다. 차라리 몰랐던 것이 더 좋았는지 몰랐다. 아버지란 혈육을 찾고 보니 그것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자기 자식이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아버지란 작자는 그렇게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방탕한 호색한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기랄! 어차피 없었던 아버지야! 새삼스럽게 내게 아버지란 존재가 무슨 필요가 있어? 그냥 이렇게 살면 되는 거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 혼마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줄도 모르는 아버지에게 새삼스럽게 내가 당신 자식이요 하고 나타나는 것도 우습고 무엇보다도 돌아가신 엄마에게 면목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그냥 모든 것을 웃으며 넘겨 버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 우습게도 장난처럼 혼마를 찾아왔다. 이시연! 운명처럼 이시연이라는 여인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이미 불구속 처리되어 그의 뇌리에서 잊혀 버린 윤재형의 도주사건으로 인해서 말이다. 바로 이시연이 돌연 윤재형과 같이 차에 타고 있었던 일행이라며 나타났고 그리고는 윤재형이 술이 취해 사람을 취고서는 그대로 도주했다는 증언을 하고만 것이다. 새삼스럽게 나타나 증언하는 이유로는 자신이 윤재형에게 버림을 받아서 도저히 가만 둘 수가 없어서라고 했다. 수사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혼마는 처음에는 반신반의를 했다. 하지만 정확하게 사건 현장을 그대로 재현하는 이시연의 답변에 신빙성이 있다는 판단이 섰다. 혼마는 수사관과 동행하여 이시연을 만났다. 이미 모든 정황을 진술한 이시연은 참담한 모습으로 허물어져 있었다. “그날 윤재형과 같은 차에 동승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까?” “네! 같이 있었어요.” “그런데 왜 이제야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당시에 경찰에 말하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혼마의 물음에 이시현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그걸 꼭 내입으로 말해야 할까요? 좋아요! 굳이 말하라면 못할 이유가 없지요! 그땐 그래도 그 놈이 변신할 줄을 몰랐으니까요! 그게 내 답이에요. 됐어요?” “그러니까 윤동현이 변신을 해서 그 앙갚음으로 고발을 한다는 이 말이지요? 맞습니까?” “네! 맞아요! 내가 그놈에게 할 수 있는 복수라곤 고작 이것이 전부니까요! 돈 많고 권력 있는 놈에겐 나 같이 힘없고 나약한 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 이시연이 눈물을 흘렸다. 검은 마스카라가 흘러 눈자위를 시커멓게 물들여도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혼마는 잠자코 그녀를 지켜보다가 크리넥스를 내밀었다. “당신의 이 증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고 있습니까?” “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없는 말을 하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되던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 “그래요? 두 사람이 연인사이였다면 아마도 그쪽애서는 온갖 방법을 모두 동원해 당신을 괴롭힐 탠데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어쩌면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들고 나와 당신을 압박 할 수도 있을 탠데요?” 혼마의 질문에 이시연의 표정이 변했다. “네?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라면 어떤…….” “가령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치부라든지 어쩌면 신상에 관한 공격도 서슴지 않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은 치졸하기 짝이 없는 변호사들을 대동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네? 그, 그건 미쳐 생각해 보지……그럼 어쩌지요? 전 그놈을 용서하고 싶지 않는데요!” 혼마는 이시연을 찬찬히 쳐다봤다. 울컥하는 마음에 우발적으로 고발을 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다만 법이라는 것을 모르다 보니 두려움이 넘치는 것이 모든 것의 전부였다. “용서하지 않겠다! 정말입니까? 정말 끝까지 윤재형과 싸울 자신이 있습니까?” “네! 싸우겠어요! 그놈은 내 알량한 자존심을 깡그리 망친 놈이에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요!” 이시연이 독기를 품고 외쳤다. 혼마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본의 아니게 그는 다시 윤재형과의 씨름을 하게 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역기기 싫은 그의 생부와의 악연이 질기게도 연결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의 앞에 시커먼 마스카라 먹물을 있는 대로 쏟아내는 이 여인으로 인해 말이다. * 성북동 고개를 지나 북악산 기슭의 움푹 들어간 곳에 신영그룹 윤여몽 회장의 저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겉으로 봐서는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저택은 넓은 평수와는 반대로 입구에서부터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되고 있었다. 윤동현은 자신의 벤츠를 몰고 성북동 저택 앞에 멈췄다. 오늘은 일 년이면 몇 번 정도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조부의 제삿날이었다. 명절과 제삿날이 아니고는 가족이 모두 모이기가 힘들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 중 하루였던 것이다. 육중한 차고 문이 열리고 윤동현은 벤츠를 차고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자 여느 때와 같이 낯익은 얼굴이 그를 반겼다. 오랫동안 집안의 대소사를 맡아보고 있는 박 실장이었다. “오셨습니까?” “네! 잘 계셨어요? 모두 모였습니까?” “예! 회장님께서는 일찍 퇴근을 하셔서 대표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요? 형님들은 모두 오셨고요?” “네! 사모님들도 이미 모두 오셔서 한참 제사 준비 중이십니다.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박 실장이 윤동현의 어깨에 묻은 양복의 먼지를 털어 주었다. “후후! 그래요? 오늘도 역시 제 이야기가 도마 위에 올라갔겠군요? 그렇지요?” “네? 아, 아닙니다. 아무도 대표님 말씀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후후! 그거 알아요? 박 실장은 거짓말을 하면 말을 더듬는다는 것을요?” 윤동현은 빙그레 웃고는 정원을 가로질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만드는 기름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와! 맛있는 냄새! 내가 좋아하는 생선전 냄새가 아주 좋습니다!” 윤동현은 거실을 가로지르며 주방을 향해 음성을 높였다. 주방에서 큰형수인 유미란이 고개를 내밀며 그를 반겼다. “서방님 오셨어요?” “예! 형수님이 수고가 많으시네요. 사람을 사서 하면 좋으련만 아버지가 제사상을 남에게 맡기는 것을 질색을 하시니 원!” “호호호! 그래도 전 아버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해요. 제사 음식을 남들에게 맡긴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자연스럽지 못해요.” 유미란이 환하게 웃었다. 앞에는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유미란의 옆에는 둘째 형수인 김청미가 역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김청미가 동현에게 말했다. “모두 뒤편 정원에 계세요. 가보세요.” “네!” 동현은 웃으며 주방을 가로질러 뒤편으로 나갔다. 뒤편 정원은 잔디 위에 바비큐 시설을 갖추고 가족까리 간단하게 만찬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윤 회장을 비롯한 동현의 큰형인 윤동수와 둘째 형인 윤동석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조카인 윤재형과 재동, 재규도 같이 앉아 있었다. “저 왔습니다. 아버지!” 동현은 윤 회장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윤 회장이 표정 없이 쳐다보고는 이네 고개를 돌렸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라 동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큰형인 동수와 둘째인 동석에게 인사를 했다. “왔어?” “네! 오랜만입니다.” “그래. 사업은 잘 되고?” “후후! 사업이랄 것이 뭐 있겠어요? 형님에 비하면 조그만 구멍가겐데요.” 동현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는 포도주를 비웠다. “구멍가게라니? 그래도 조부님께서 창업하신 우리 신영그룹의 모태가 방직공장이 아니냐? 넌 우리 가문의 상징인 방직공장을 경영하는 경영주야!” “후후! 그래요? 그런데 어쩌지요. 난 그 방직공장을 하루라도 빨리 처분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알다시피 요즘 방직공장이 어디 경쟁력이 있어야 말이지요.” 동현은 빈정거리며 포도주를 따라 마셨다. 윤 회장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동현을 향해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고 말도 섞지 않았다. 조카인 재형이 웃으며 말했다. “삼촌이 그래도 우리 신영그룹의 상징인 방직공장을 물려 받으셨잖아요? 그게 어디 아무나에게 물려주는 것입니까?” 동현은 씩 웃으며 재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푸념 썩힌 하소연을 했다. “이놈아! 땅만 널찍한 방직공장이 얼마나 골친지 알아? 공장부지가 넓어 세금은 왕창 나오는데 겨우 적자를 면하는 공장에 망할 놈의 노조는 왜 그렇게 강성인지! 정말 지겨워 죽겠다!” “에이! 웬 엄살이세요? 들리기엔 삼촌이 제일 부자라고 하던데! 방직공장 부지가 어디 한두 평이에요? 자그마치 삼만 평이잖아요.” “야! 말이 삼만 평이지 그게 어디 쓸 만한 땅이야? 공시지가가 평당 만원도 안 되는 쓸모없는 땅이야!” 동현은 공연히 윤 회장이 들으라는 듯이 목청을 높였다. 윤 회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동현을 봤다. “이놈이 그걸 조카들 앞에서 말이라고 하는 거야? 당장 그만두지 못해!” 윤 회장이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동현은 아무렇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왜 그러세요? 방직공장은 아버지가 물려준 것도 아닌데 왜 저에게 생색을 내고 그러세요? 방직공장을 물려준 것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에요! 할아버지요!” “뭐야 인마! 할아버지가 헛으로 너에게 방직공장을 물려 주셨어? 방직공장이 우리 신영그룹의 모태이니까 잘 키우라는 유언은 잊어 버렸어?” “누가 뭐래요? 그래서 끽소리 하지 않고 공장 운영을 하고 있잖아요! 솔직히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형들은 모두 알짜배기를 물려받았지만 저만 고리탑탑한 방직공장을 물려받았잖아요! 아니에요?” 동현은 입을 삐죽이며 윤 회장에게 빈정거렸다. 윤 회장이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어유! 이 자식은 자식새끼가 아니라 원수야! 도대체 말이 통하지가 않아! 어디서 저런 망나니가 태어났는지 원!” 윤 회장이 주먹을 지고 동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나이가 몇 살이야? 오십을 넘긴 놈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니! 도대체 언제나 정신을 차릴 거야?” “아버지! 갑자기 왜 그래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겁니까?” “뭐야 인마! 그럼 네가 지금 정상이라는 거야? 세 번이나 이혼을 하고 아직도 미친놈처럼 헤메고 다니는 놈이 정상이라는 거야?” 윤 회장이 기어이 언성을 높이며 소리쳤다. 되도록 제삿날이고 헤서 언성을 높이지 않아려고 했어나 도저히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현은 오히려 적반하장이라고 윤 회장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세요? 막말로 네가 길거리에서 자식새끼를 데리고 들어왔어요? 아무리 여자관계가 복잡해도 아버지에게 속 썩인 적은 없잖아요!” “뭐야 이놈아! 차라리 어디 자식이라도 내질러 놓던가! 어유! 속 터져!” 그러나 윤 회장은 그만 속이 터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들 윤 회장을 따라 일어났고 윤 회장이 첫째 아들인 동수에게 말했다. “아무튼 제사 끝나고 보자! 어서 제상 준비해라.” “예! 아버지!” 윤 회장이 핏대를 내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제야 동수가 동현을 나무랐다. “넌 왜 그래? 어떻게 아버지와 부딪치면 싸우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하여간 난 아버지하고 맞지가 않아! 도무지 말이 통하지가 않으니까 말이야!” 동현은 신경질적으로 포도주를 벌컥거리며 마셨다. 그리고 제사상이 차려지고 모두들 묵묵히 제사를 지낼 동안 그렇게 평안하게 지나가는 듯했다. 문제가 터진 것은 제삿밥을 먹는 중이었다. 재형의 뺑소니 사건이 도마 위에 올랐던 것이다. 윤 회장이 밥을 먹던 중 재형에게 물었다. “너 사고 수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서? 도대체 무슨 일을 그렇게 엉성하게 한 거야?” 재형을 비롯한 식구들이 모두 표정이 굳어졌다. 사실 모두들 말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재형의 위태위태한 행동에는 모두가 불안한 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재형의 어머니인 유미란은 맏아들인 재형이 혹시나 윤 회장의 눈에 벗어날까 노심초사 하였던 것이다. 윤 회장이 항상 입버릇처럼 싹수가 노란 자식은 신영그룹을 물려주지 않겠다며 호언장담을 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셋째아들인 동현의 방탕한 생활이 크게 한 목 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 아니에요. 아버님! 모두 잘 해결 됐어요. 너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돼요.” 유미란이 성급하게 말을 앞세워 재형을 보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정황을 파악하고 있는 윤 회장이었다. 윤 회장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쯧쯧! 집안에 장손이라는 놈이 어찌 그렇게 사리분간을 하지 못해! 김 변호사 말로는 차에 같이 타고 있던 여자가 다른 말을 한다면서? 에이! 못난 놈! 내가 그렇게 남자는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고 했었거늘 어떻게 하는 짓이 그래? 에이!” 윤 회장이 재형을 노려보며 혀를 찼다. 재형이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지를 못했다. “사건이 수습될 때까지 당분간 백화점에서 손을 때! 알겠어?” 윤 회장이 재형에게 소리쳤다. 재형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하, 할아버지! 백화점에서 손을 때다니요? 왜요?” “몰라서 그래? 백화점이 뭐하는 곳이야? 고객들을 상대하는 곳이야. 그런데 백화점 오너란 놈이 여자를 차에 태우고 사람을 치워놓고 도주를 해? 고객들이 뭐라고 하겠어? 당장 백화점 매출과 관계가 없겠어?” “…….” “그렇게 알고 조치를 취하도록 해! 알겠어?” 윤 회장이 윤대수에게 억압적으로 명령을 했다. 유미란의 얼굴색이 하얗게 바랬다. 재형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윤 회장이 동현에게 말했다. “김 변호사 말로는 재형이 사건을 맡은 검사가 꽤나 까다롭다고 하던데 한번 알아봐. 검사가 마음먹기에 따라 사건이 쉽게 풀릴 수도 있지 않겠어?” 동현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김 변호사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어요? 제가 법조계 사람들을 많이 알고는 있지만 일단은 김 변호사에게 맡겨 보지요.” “뭐야? 김 변호사가 가족이야? 아무려면 가족이 나서는 것만 하겠어? 잔말 말고 검사가 누군지 알아봐. 좋게 풀 수 있으면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란 말이야!” “아, 알았어요. 그럴게요.” 동현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윤 회장이 못마땅한 눈으로 동현과 재형을 번갈아보며 혀를 찼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재형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윤 회장을 비롯한 식구들이 찻잔을 앞에 두고 모여 앉았다. 윤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재형이 놈을 장가부터 보내야겠어! 저놈이 저렇게 방탕한 생활을 해서야 어디 마음을 놓을 수가 있어야지!” 모두들 윤 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입도 벙끗하지 못했다. 윤 회장이 유미란에게 말했다. “넌 도대체 어미가 돼서 뭐하는 사람이야? 자식 놈을 저렇게 내버려 둘 샘이야?” “아, 아닙니다, 아버님!” “주변에 벌써 소문이 뭐라고 난 줄 알기나 한 거야? 재형이란 놈이 파락호란 소문을 넌 듣지도 못한 거야?” 유미란이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지 못했다. 윤 회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어미가 저렇게 태평이니 말하지 좋아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내일부터 당장 어미는 되도록 빨리 재형이 혼처를 알아봐라. 장가를 가야 사람이 되던 뭐가 되도 될 것 아니야!” “예! 아, 아버님!” 유미란이 눈치를 살피며 대답을 했다. 윤 회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에이! 어째 자식새끼들이 변변한 놈이 하나도 없는지! 참 걱정이다. 걱정!” 윤 회장이 벌컥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들 얼굴을 들지 못하고 윤 회장의 눈치만 살폈다. “보기 싫다! 모두 그만 가거라!” 윤 회장이 언성을 높이고는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모두들 멍한 얼굴로 부랴부랴 성북동 집을 떠났다. 동현 역시 자신의 차로 향했다. 박 실장이 동현의 뒤를 따라 배웅을 하려고 했다. “아버님 왜 저러시는 거예요? 신경질이 부쩍 심해지셨네요.” 그러자 박 실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요즘 들어 부쩍 걱정이 많으십니다. 마땅히 후계자를 선정하시기가 힘들다고 하시면서요.” “네? 후계자요? 아니 후계자라니요? 재형이가 있고 재규 재동이가 있는데 무슨 후계자 걱정을 한답니까?” “글쎄요! 회장님 눈에 차지 않은 모양이지요. 요즘 들어 회장님께서 부쩍 걱정하시는 것이 사실 도련님들이 회장님 눈에 드는 행동들을 하지 않지 않습니까?” 동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뭐가 달라진답니까? 어쨌든 잘 타일러서 잘 되는 방향으로 끌고 가야지 어쩌겠어요?” 동현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차에 올랐다. 박 실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이라도 회장님 눈에 벗어나지 않게 잘 하십시오. 사실 회장님께서는 대표님에게 가장 크게 기대를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조그만 방직공장 하나 꾸려 가는데도 골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저더러 신영그룹을 맡으라고 한다면 전 아마도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겁니다. 하하하!” 동현은 어림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차에 올라 차고를 빠져 나갔다. 박 실장이 물끄러미 동현을 배웅했다. 나이들은 실장은 고개를 들어 이층을 바라봤다. 이층에서 윤 회장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 실장이 윤 회장을 보고는 고개를 옆으로 절래 흔들었다 윤 회장이 고심한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북동 집은 조용하게 침묵으로 감싸졌다. * 혼마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자신의 앞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재형을 노려봤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재형은 완강하게 부인만을 거듭했다. 이미 사건 자체가 보상이 모두 끝났고 사망자의 가족이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데 무슨 죄를 덮어씌우려고 하느냐며 길길이 날뛰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차에 같이 타고 있었다던 김시연과는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맹세코 사고 당일에 같이 차를 타고 있지 않았다고 우겨댔다. 사실 당일의 CCTV에는 차에 동승한 사람까지는 찍히지가 않아 도저히 구분되지도 않았고 우겨대는 재형에게 강압적으로 자백을 받아 낼 수도 없었다. 변호사는 녹음기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여자 말만 곧이듣고 재형의 말은 듣지 않는다는 그 말만 되풀이 했던 것이다. 사실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이상 재형에게 자백만을 강요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는 것이었다. 혼마는 일단 재형을 돌려보내고 깊은 시름에 잠겼다. 따지고 보면 그냥 여기서 사건 자체를 덮어버려도 아무런 상관은 없었다. 이미 사망자에게는 충분한 보상이 끝나 있었고 또한 정황이 사건을 종결짓는다고 해서 문책을 받을 일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가 싫었다. 상대가 그와는 사촌지간이 되는 형이라고 해서가 아니었다. 하여간 오기 비슷한 상대에게 자신을 어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혼마는 이시연을 다시 불렀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정황들을 들어서 너무도 훤하게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 입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식사를 같이 할 까요?” 혼마는 막 검사실로 들어온 시연에게 말하며 일어섰다. 시연이 마지못해 혼마를 따라 검사실을 나섰다. 그들은 곧바로 검찰청사 밖의 설렁탕집으로 들어갔다. 설렁탕을 시켜놓고 혼마가 시연에게 물었다. “윤재형이 완강하게 이시연 씨와 함께 있지 않았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네! 들었어요.” “물증이 없어 기소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시지요?” “네!” 시연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혼마가 얼굴을 찌푸리며 시연을 봤다. 그러자 시연이 아주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처음부터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말씀 하셨잖아요? 안 그래요?” “그랬지요.” “그럼 이제부터는 검사님께서 윤재형에게 죄를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게 검사님께서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네? 그, 그야 그렇지만…….” 맞는 말이었다. 죄를 묻는 것은 검사가 할 일이지 시연이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개운치가 않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날 같이 차에 있었다는 증명을 할 만한 것이 없을까요? 혹시나 해서 윤재형의 차에 블랙박스가 있는지도 확인해 봤습니다만 보이지가 않았어요.” “글쎄요!” 혼마가 고심을 하며 생각을 하다니 불현듯 생각이 났는지 다급하게 물었다. …… “혹시 그날 핸드폰을 쓰지는 않았나요? 그 차에서 전화를 걸었거나 받지 않았나요?” “전화요? 그, 글쎄요. 갑자기 물으니까 기억이…….” “잘 생각해 보세요! 만약 통화 기록이 있다면 어쩌면 그 차에 타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될 수도 있을 탠데요.” 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이 날 정도로 사건이 발생한 날이 가깝지가 않았던 것이다. 혼마는 검사실로 급히 전화를 넣었다. 그리고 검사실 수사관에게 말했다. “당장 전화국에 가서 그날 이시연 씨 핸드폰 기록을 찾아보십시오! 그날 핸드폰이 움직였던 기록을 보면 그 시간에 동부간선도로 위에 있었는지 나타 날 겁니다. 아셨어요?” 혼마가 급하게 지시를 하고는 시연을 봤다. 시연이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기억이 나는데 그날 차에 타기 전에 친구와 전화를 한 적은 있어요. 거기가 압구정동이었고 출발하기 전에 윤재형과 만나기로 했었기에 서로 통화를 한 적은 있었어요.” “그래요? 윤재형과 전화를 주고받았단 말이지요?” “네! 통화기록을 보면 아마도 나타날 거예요.” 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과 재형의 전화기록을 대조해 보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설렁탕이 나오고 두 사람은 묵묵히 수저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문득 혼마는 시연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단순히 윤재형이 변심했기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시연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왜요? 그게 왜 궁금해요?”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사랑에 대한 변심의 오기라면 윤재형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불쌍해요? 그 인간이? 호호호! 검사님은 불쌍한 것이 뭔지 모르는 모양이네요. 그런 인간이 불쌍하다면 말에요.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지요. 그 인간은 사랑 자체를 모르는 인간이니까요!” “…….” 시연이 흐릿한 눈으로 혼마를 보며 말했다. “제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세요?” “아니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듣기엔 광고 계통에서 일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맞아요! 신영백화점 홍보부에 근무했었어요. 그리고 윤재형은 바로 백화점 오너였고요!” 시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나도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어요! 윤재형이 그런 오해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저를 공략했었거든요. 하지만 곧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그자에게는 단순한 오락이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난 그저 그놈이 쳐 놓은 그물에 걸려든 하루살이 였고 말에요!” “하루살이요?” “네! 하루살이! 그놈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면 그 다음엔 여지없이 여자를 차버리는 그런 놈이에요!” 혼마는 그만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결국 시연은 재형에게 이용만 당하고 바림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백화점 오너인 재형의 달콤한 재력 앞에 그녀 스스로 허물어진 것인지도 몰랐다. 많은 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자연히 막연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시연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돈 앞에 굴복하는 천박한 그렇고 그런 여자처럼 보였던 것이다. 시연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속없는 여자처럼 보이지요? 돈 앞에 굴복한 여자로 보진 마세요. 상황은 그랬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천박한 여자는 아니에요!” 시연은 냉소를 짓고는 일어섰다. 오히려 혼마가 당황스럽기도 했다. “내가 이러는 것은 단순히 그놈이 나를 버렸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 놈은 내 직업에 관한 모든 것도 함께 사라지게 했어요! 백화점 광고업계에서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단 말에요!” “직장까지 다니지 못하게 했단 말입니까?” “네! 다른 회사에도 다니지 못하게 온갖 구설수에 시달리게 했단 말에요. 광고업계에선 절 완전 이방인 취급을 할 정도로요!” 혼마는 측은한 얼굴로 시연을 봤다. 시연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시연을 돌려 보네고 혼마는 곰곰이 생각을 했다. 결국 윤재형을 구속시키고 죄를 물으려면 이시연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이시연이라는 여자를 어쩌면 구렁으로 밀어 넣는 결과를 가져 올 수가 있었다. 혼마를 망설이게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앞길이 창창한 그것도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여자를 법정에 세워 만신창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분별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전화국으로 갔던 수사관으로부터 사건이 일어나는 날 윤재형의 한드폰과 김시연의 핸드폰 통화 기록과 이동간의 동선이 확인 되었다. 일치! 김시연의 이동 동선이 동부간선도로를 지나갔음이 핸드폰에서 확인되었고 그것은 바로 윤재형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란 결정적인 증거였다. 혼마는 쾌재를 부르며 사건을 다시 재수사했고 윤재형은 구속 수사하는 것으로 결정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혼마는 뜻하지 않은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바로 윤동현이었다. 윤동현!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는 그를 점심시간에 선배 검사의 전화로 인해 대면하게 된 것이다. “도 검사! 오늘 점심 같이 하는 것 어때?” 선배 검사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점심을 같이 하자고 했고 거절 할 수 없는 입장의 혼마가 마지못해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약속장소인 일식집으로 가자 거기에는 바로 윤동현이 선배 검사와 합석해 있었던 것이다. “도 검사! 인사하지. 여기는 신영물산의 윤동현 대표일세. 우리 법대 동문이시지. 한 때는 변호사를 하시기도 했고 말이야.” 선배의 소개에 윤동현이 환하게 웃으며 혼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하하! 도 검사!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요즘 제 장조카 사건이 도 검사의 손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해하진 마십시오. 그 사건 때문에 도 검사를 만나려는 치졸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하하하!” 윤동현이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혼마는 순간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분간이 서지 않았으나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렇습니까? 같은 법조계 출신이라니 뜻밖이군요.” “하하하! 부끄럽습니다. 원래는 변호사가 꿈이었는데 부득이 사업을 하게 됐습니다. 집안에 성화가 대단해서 어쩔 수 없이 말입니다. 하하하!” 윤동현이 웃으며 혼마의 잔에 술을 따랐다. 혼마가 점심시간이라 술을 거부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근무 중이라…….” “하하하! 간단하게 한잔 하는 것이야 뭐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남자들 만남에는 술이 들어가야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윤동현이 웃으며 혼마에게 잔을 내밀었다. 선배가 받으라는 눈짓을 보내자 혼마는 어쩔 수 없이 잔을 받았다. 윤동현이 술잔을 들고 외쳤다. “평등의 진리를 위해 건배!” 윤동현이 싱긋 웃고는 술잔을 들이켰다. 그제야 혼마는 찬찬히 윤동현을 봤다. 머리가 희끗한 것이 나이가 들어 보여서 그렇지 얼핏 보면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진 속에 봤던 그 얼굴보다는 나이가 들었지만 첫눈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윤동현은 혼마와 너무도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조카인 윤제형의 사건으로 절 만나려 하신 겁니까?” 혼마는 고지식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윤동현이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전혀 아니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검사 마음대로 되는 겁니까?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벌을 벋어야 하는 거지요!” “네! 그렇습니다. 윤재형은 분명히 죄를 지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뺑소니를 쳤거든요.” 윤동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래도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 할 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선처를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번 기회에 그놈을 사람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사실 그동안 그놈이 재대로 사람 구실을 못했었거든요. 그것이 우리 가족들의 바람입니다!” “네? 사람을 만들고 싶다고요?” 혼마는 뜻밖의 윤동현의 말에 조금은 놀랐다. 윤동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곧이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놈은 우리 가족의 우두머리인 아버지에게서 눈 밖에 난 놈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사람을 한번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감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말입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더 이상 할 것이 없네요. 말씀대로 법대로 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혼마가 냉정하게 말하였다. 그러자 선배 검사가 말했다. “도 검사!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에는 이 사건을 불구속으로 처리하면 안 될까? 사회봉사를 많이 하는 것으로 입장 정리를 했으면 하는데 말이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 말은 구속 대신 사회봉사를 많이 하는 것으로 대신하잔 말이지. 그것이 여러 가지로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이미 윗선에서도 그렇게 결정들을 봤네.” 선배 검사가 강압적으로 말했다. 혼마는 그만 심사가 뒤틀리는 충동을 받았다. “잠깐만요! 결정을 보다니요? 담당 검사가 전데 제가 모르는 결정을 봤다는 겁니까? 도대체 누k 그런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아니 이 사람 왜 이렇게 빡빡하게 그래! 윗선이 어딘지 정말 몰라서 그래?” “예! 모릅니다! 제가 담당 검삽니다! 검사가 윗선 눈치를 살피며 수사를 하라는 겁니까? 선배!” 혼마는 발컥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선배 검사가 핏대를 내며 외쳤다. “이 사람이 왜 이래? 좋은 것이 좋은 거야! 너무 강하면 바람에 부러지는 법이야!” 선배의 고함에 혼마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윤동현을 향해 소리쳤다.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또 다시 이런 일로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만약 또 다시 이런 일이 있을 시에는 아무리 선배라고 해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지검장님께 직접 말씀을 드려서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판가름해 보이겠습니다!” 혼마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윤동현이 그만 입이 봉해져 말을 하지 못하였다. 선배는 얼굴이 울그락 붉그락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혼마는 그길로 곧장 일식집을 나오고 말았다. 그것은 처음으로 만난 생부와의 첫 대면을 완전히 망쳐 놓은 결과를 가져왔다. 아주 묘하게도 그들은 그렇게 처음부터 삐꺽거렸던 것이다. * 존재감!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혼마의 치졸한 작전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서라기보다 당신의 자식이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고 또한 그들에게 검사로서 누구든 부러워하는 그런 사람임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당장이라도 내가 바로 당신의 아들이고 신영그룹의 가족이라 할 수 있는 당당한 일원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세상에 홀로된 자신의 외로움을 위로받고 싶은 절실한 마음일 것이라는 자책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행동으로 옮기기엔 적어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또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활씬 더 혼마를 자극했다. 윤재형은 특가법 위반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되고 기어이 법정 구속이 되고 말았다. 혼마의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는 구속영장 청구 이유에 법원이 손을 들어준 것이다. 윤재형은 악에 바쳐 온갖 악담을 하며 구속이 되었고 재판의 절차만이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신영그룹 법무팀의 고문 변호사인 김창식 변호사가 혼마와의 면담을 요청해 왔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 혼마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김 변호사를 만났다. “도 검사님! 우리 신영그룹과 큰 원수가 아닌 이상 이 쯤에서 좋게 해결책을 찾아봅시다! 아시겠지만 신영그룹은 신세를 지면 반드시 은혜를 갚습니다!” “글쎄요! 해결책이라고 하시면 곤란하지요. 정식으로 법의 심판을 받으면 그것이 해결책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도 검사님! 왜 이러십니까? 저희 변호사들은 신영그룹 소속 고문 변호삽니다! 그런데 그룹 장손이 법정 구속이 됐다고 한다면 우리 변호사들 채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구속이 되는 이상의 벌을 받으면 안 되겠습니까?” 김 변호사가 난처한 얼굴로 사정을 했다. “구속되는 이상의 벌을 받겠다고요? 어떻게 말입니까?” “그야 검사님께서 정하셔야지요. 우린 거기에 따라 가기만 하면 되고 말입니다.” “제가요? 후후! 정말 제가 결정한대로 따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법정 구속만 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이든 다 할 겁니다!” 김 변호사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래요? 하면 윤재형이 신영그룹의 모든 지분에서 제외 할 수도 있습니까?” “네? 지분에서 제외라면 그, 그럼 경영에서 손을 때라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거, 검사님! 그건 검찰이 기업 경영에 압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어,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김 변호사가 펄쩍 뛰었다. 그러자 혼마가 냉철한 표정으로 말했다. “경영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다만 윤재형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반성할 수 있는지를 보려는 겁니다. 지금 윤재형에게 가장 가혹한 처벌이 뭐겠습니까? 바로 회사 경영에서 손을 때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그야 그렇지만…….” “제가 제시할 수 있는 마지막 협상은 거기까집니다! 모든 회사 경영에서 손을 때고 향후 이년간 사회봉사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제시하는 마지막 방법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하루만 여유를 주십시오. 이 문제는 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윗선에 말씀을 드리고 검사님 제안을 관철되도록 하겠습니다!” 김 변호사가 울상이 되어 검사실을 나갔다. 그리고 김 변호사는 곧장 윤동현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날세! 지금 막 검사실에서 나오는 길인데 문제가 심각하게 됐네!” “왜 그래? 뭐가 문젠데 그래?” 윤동현이 아무렇지 않는 듯이 물었다. “검사가 재형이를 그룹 경영에서 손을 때는 조건을 붙였어. 백화점은 물론 그룹 경영 일체에서 완전히 뒤로 물러나는 조건으로 구속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하는군.” “뭐, 뭐라고? 경영에서 손을 때는 조건이라고? 아니 검사가 뭔데 남의 경영방침을 들고 나오는 거야? 대한민국 검사가 언제부터 기업 경영에까지 관섭을 했어?” 윤동현이 핏대를 올리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김 변호사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전혀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야. 죄에 대한 벌이라면 그것 역시 벌일 수도 있지 않는가? 죄를 지은 자는 누가 뭐래도 재형이니까 말이야!” “…….” “그래서 말인데 회장님께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겠나?” 윤동현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 변호사가 다시 한 번 재촉을 했다. “이봐! 동현이! 이번 일은 자네 조카의 일이기도 하지만 장차 신영그룹의 후계자 선정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일이야! 그러지 않아도 회장님 눈 밖에 난 재형인데 이번 일로 인해 어떻게 될지가 걱정이란 말일세. 부회장님에게도 어떻게 보고를 해야 할지 걱정이고 말이야!” 윤동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형님에게 보고는 걱정할 필요 없어. 문제는 회장님이야. 자칫 이번일로 재형이란 놈을 가족 명단에서 제외시킬 수도 있단 말이야.” “서, 설마 그렇게 까지 하시 지야…….” “무슨 말이야? 아버지 성격을 몰라서 그래? 아들인 나도 눈 밖에 나니까 가차 없이 내쫒은 양반이야!” “무,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그럼 어떡하지? 그렇다고 보고하지 않을 수도 없고 말이야.” “사실대로 말씀드려! 지금은 그것밖에는 도리가 없어.” 윤동현이 냉정하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김 변호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친구지만 윤동현은 때로는 매몰찬 대가 있었다. 그것은 그룹 회장인 윤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눈 밖에 나면 좀처럼 만회할 수가 없을 정도로 차디찬 냉정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 변호사는 강남대로의 본사 건물로 들어갔다. 회장실은 35층에 있었다. 미리 통보를 해둬서인지 비서실에서 김 변호사를 보자 곧장 인터폰을 눌렀다. “회장님! 김 변호사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카랑카랑한 윤 회장의 음성이 인터폰을 통해 들렸다. 김 변호사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회장실로 들어서자 의외로 윤 회장이 바둑판 앞에 앉아 있었다. 윤 회장이 고개를 돌려 김 변호사를 봤다. “이리 앉게.” 윤 회장이 맞은 편 소파를 가리켰다. 김 변호사가 눈치를 보며 윤 회장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무슨 일인가?” 윤 회장이 바둑판에서 시선을 때지 않으며 물었다. “예! 회장님! 시, 실은 곤란한 문제가 생겨서……백화점 경영에서부터 차질이 생길 것 같아서…….” “백화점 경영에 차질이? 그게 무슨 말인가? 차질이라니?” “그, 그게 좀……그러니까 윤 대표의 재판을 주관하는 검사가 법정구속을 피할 수 있는 방도를 윤 대표에게 모든 경영에서 물러나는 조건을…….” “뭐! 경영에서 물러나는 조건을 붙였단 말인가? 검사가?” “예! 회, 회장님!” 윤 회장이 놀란 눈으로 김 변호사를 봤다. 그리고 잠시 후 윤 회장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검사가 경영에 손을 때는 조건으로 합의를 제시했단 말이지? 그 재미있는 검사구먼! 안 그런가?” “네? 그, 그렇습니다. 회장님!” “허허허! 재미있구먼! 우리 신영그룹이 백년을 이어져 내려오면서 이토록 경영권에 제동을 건 사람이 어디 있었는가? 안 그런가?” “예! 그, 그렇습니다, 회장님!” 윤 회장의 얼굴에 금세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냉혹한 얼굴로 김 변호사를 봤다. “그런데 지금 일게 검사가 우리 신영그룹의 경영권에 이의를 제기한단 말이지? 감히 신영그룹의 경영권에!” “회, 회장님! 그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검사는 임시적으로 윤 대표가 반성하도록 하겠다는…….” 윤 회장이 인터폰을 들었다. 그리고 비서에게 소리쳤다. “당장 이사회를 소집하도록 해! 이사회 안건은 백화점 대표인 윤재형을 경영에서 제외시키고 새로운 대표를 선임하는 것이야. 당장 소집해!” 김 변호사는 깜짝 놀라 윤 회장을 봤다. 윤 회장의 얼굴에는 이미 결심을 굳힌 담담한 표정이었다. 윤 회장이 굳은 얼굴로 김 변호사를 봤다. “그 검사가 이름이 뭐라고 했나?” “예! 도혼마라고 합니다.” “도혼마? 그 참 이름이 독특하구먼.” “예! 아직 신임 검사지만 장래가 유망한 검사입니다. 주변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그런 검사입니다.” “도혼마라! 후후! 한번 들으면 절대로 잊지는 않을 이름이로군. 안 그런가?” 윤 회장이 날카로운 눈으로 김 변호사를 봤다. 김 변호사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윤 회장의 특유의 날카로움이었다. 특히 새로운 도전을 할 때에 나타나는 특유의 눈빛 말이다. 윤 회장이 김 변호사를 보며 물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 유능한 검사를 우리 신영그룹으로 영입할 수 있겠는가?” “그, 글쎄요! 쉽지는 않을 겁니다. 사법 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하면서도 유능한 로펌에서 끌고 가려고 했으나 본인이 검사를 사수하면서 마다했으니까요.” “허허허! 그래? 궁금해지는군. 어떤 인물인지가 말이야. 기회가 된다면 한번 만났으면 하는데?” “그, 글쎄요! 한번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만 기대는 하시지 않는 것이……….” 김 변호사의 말에 윤 회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그런가? 신영그룹의 오너인 이 윤여몽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란 말이지? 좋아! 언제든 기회가 있다면 만나게 되겠지. 인생이란 묘한 것이어서 그런 기분이 드는 사람은 정말 꼭 만나게 되더란 말이야! 허허허!” 윤 회장이 호쾌하게 웃으며 바둑판을 엎어 버렸다. 바둑돌이 우르르 흐트러졌다. “그나저나 재형이란 놈을 어떻게 할지 알겠지?” 윤 회장의 눈에 핏발이 섰다. “당장 모든 경영에서 손을 때게 할 것이야! 차후에 신영그룹과 관계되는 모든 업무에서 손을 때게 할 것이고 지금부터는 그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놈이야. 알겠나?” “…….” “음! 너무 방관했어! 맏아들인 아비란 것도 희미해서 자식하나 살피지 못했고 마누라 치마폭에 쌓여 희희낙락했으니 자식새끼인들 재대로 컸을 리가 없지!” “회장님! 하지만 부회장님께서 가만히 게시지 않을 탠데요? 더구나 사모님께서 친정인 사주그룹을 등에 업고 압박을 해 올 수도 있을 탠데요!” 윤 회장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흥! 그런다고 이 윤여몽이 눈이라도 깜빡 할 줄 알아! 그러지 않아도 큰며느리가 사돈 회사를 믿고 설치는 꼴이 보기 좋지 않았어! 신경 쓸 필요 없어!” 윤 회장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는 김 변호사에게 말했다. “김 변호사는 오늘부터 우리 신영그룹에서 윤재형을 제외시키는 법적 절차를 마무리해!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회장님! 이사결의서만 제출되면 서류상으로는 말씀대로 진행 하겠습니다.” “좋아! 그렇게 해! 이런 기회에 그룹 경영에 새로운 혁신을 새워야겠어! 지금 이대로는 도저히 안 돼!” 윤 회장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김 변호사는 윤 회장의 심중을 헤아리며 조심스럽게 앞으로의 일을 점쳐 봤다. 신영그룹의 후계자 구도가 그야 말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재자 윤 회장의 결단에 의해서 말이다. * 강남의 락카페 무스탕에 재형은 술에 취해 소리를 질러댔다. “이런 개새끼들! 내가 취하긴 뭘 취했다는 거야! 빨리 술 가져오지 못해?” 재형이 바텐더를 향해 소리치고는 들고 있던 유리컵을 던져 버렸다. 요란한 컵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바텐더가 급히 달려와 재형을 붙잡고 만류하려고 했다. “놔! 이 개새끼야! 내가 이대로 죽을 줄 알아? 나 이 윤재형 절대로 죽지 않아! 그까짓 새까만 검사 새끼가 날 사업에서 손을 때게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죽을 것 같아? 흥! 어림없어! 내 이 검사 개새끼를 가만 두는 가 봐라! 아주 갈기갈기 씹어 먹고 말 거야!” 재형은 고개고개 소리 지르며 술을 퍼마셨다. 그때 카페의 마담이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어머! 윤 대표님 오늘 많이 취하셨네!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으셨나?” 마담이 다리사이가 터져 허벅지가 훤하게 보이는 차이나 가운을 입고 재형의 옆자리에 앉았다. 재형의 눈이 풀린 상태로 마담을 보며 히득거렸다. “흐흐! 너 마침 잘 왔어! 이리와 내 술 한 잔 받아.” 재형이 마담의 잔에 술을 짜라 주었다. 마담이 흔쾌히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마셨다. “좋았어! 역시 내 맘을 알아주는 것은 이렇게 치마를 입은 년들이야! 히히히! 어때? 오늘 나하고 만리장성 쌓아보는 것 어때?” “호호호! 저야 좋지요! 신영그룹 후게자인신 윤 대표님과 만리장성인데 누가 마다하겠어요? 호호호!” “히히히! 그, 그렇지? 그럼! 그렇고말고! 내가 누구야? 나 윤재형이야! 신영그룹 후계재 윤재형 말이야!” 재형이 마담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한손은 술잔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흐흐! 여자들은 모조리 똑 같아! 그 망할 년도 검사 놈에게 붙어서 날 난도질을 했어! 내가 가만 두는 가 봐!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망할 년!” 재형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이시연! 이시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실 그가 이시연을 떠나보낸 것은 정말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되도록 이시연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그 자신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집착이었다. 시연은 오직 자기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것을 요구했고 그것은 방탕아 기직이 다분한 재형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다. 적당히 즐기며 그렇게 관계를 유지했다면 그렇게 악에 받쳐 아웅 거리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는 자책도 해 보았다. 그러나 시연은 재형과는 달랐다. 오직 자기 하나만 바라보며 살 것을 요구했고 그것은 재형이 바라는 이상적인 연인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씨팔! 돼도 않은 년이 날 독점하려고 덤벼든 것이 잘못이야! 내가 누구야? 신영그룹 후계자인 날 제까짓 년이 뭔데 독점 하려고 덤벼들어? 꼴 같지 않게 시리!” 재형은 비웃음을 치고는 마담의 허리를 낚아챘다. 마담이 코웃음을 치며 안겨왔다. “흐흐! 너 오늘은 내 옆에 있어줘야겠어. 알겠지?” “그럼요! 절대로 마다하지 않겠어요. 호호호!” 마담이 간드러지게 웃으며 재형의 품에 안겨왔다. 재형이 독한 스카치를 단숨에 들이켰다. “흐흐흐! 할아버지! 절더러 경영에서 손을 때라고요? 이거 왜 이러세요? 우리 신영그룹이 어디 할아버지 혼자 겁니까? 자그마치 백 년 동안 대를 물리며 내려온 대물림의 표본인 회삽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독단적으로 절 그룹에서 몰아냅니까? 흐흐! 그런다고 이 재형이가 순수하게 곱게 물러날 줄 아십니까? 어림없습니다! 절대로 이대로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절대로요!” 재형은 게스츠래한 눈으로 연신 술을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옆에는 마담이 연신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 시연은 매운 연기에 눈을 뜨지 못하며 화덕위의 곱창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속으로 넣었다. 매콤한 양념이 묻은 곱창이 고소한 내음을 풀기며 입속에서 터졌다. 시연의 맡은 편에 앉아 있는 친구인 연화가 시연의 술잔에 소주를 따랐다. “후후! 회사에서 영원히 찔린 윤재형을 위해 건배!” 연화가 자신의 잔을 시연의 잔에 소리 나게 부딪쳤다. “미친 년!” 시연은 코웃음을 치고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자 연화기 낄낄거리며 웃었다. “낄낄! 너무 고소하지 않니? 윤재형이 회사 경영에서 밀려나 뒤로 내려앉았다고 생각하니까 난 오금이 저려서 자지러지는 줄 알았다니까!” “…….” “지금 회사가 발칵 뒤집혔어! 들리는 말로는 윤재형이 후계자 구도에서도 밀렸다나 봐! 둘만 모이면 요즘은 다음 신영그룹의 후계자가 누가 될지가 관심사라니까!” “후후!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있어? 괜한 헛된 짓이야.” 시연이 쓸쓸하게 웃으며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연화가 조심스럽게 시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래도 한때는 너도 신영그룹 후계자의 부인이 될 것이라고 들떠 있었잖아. 지나고 보니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말이야.” 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연화를 봤다. 연화가 찔끔해 급히 말을 바꿨다. “미,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만…….” “아니야! 없었던 일도 아니고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이야기니까 상관없어!” 시연은 아무렇지 않는 얼굴을 하며 화덕위의 곱창을 뒤집었다. 그제야 연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윤재형도 회사를 그만 뒀으니까 이젠 다시 광고업계로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그러지 않아도 m&e에서 너에게 대해 묻더라. 눈치를 보니까 자기들 회사로 와 줬으면 하던데.” “m&e에서? 그 회사는 신영그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회사잖아?” “그럼! 신영그룹의 광고는 독점하다시피 하잖아. 그래서 네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말이야.” 시연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니야! 그 회사에는 들어가지 않을 거야. 당분간 쉬고 있을 거야.” 시연은 소주잔을 비우며 연화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자 연화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참에 회사를 하나 차리면 어떨까? 광고 회사 말이야!” “뭐? 회사를 차려? 내가?” “아, 아니지! 우리가 말이야. 만약 네가 그런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나도 동참할게! 까짓 사표내고 합류하는데 뭐가 어렵겠어?” 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니야. 나도 한때는 그런 생각도 가져 봤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 우린 너무 경험이 부족해.” “무슨 말이야? 자그마치 광고업계에서 십년이야. 특히 백화점 부분에서는 우리만큼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연화가 어림없다는 말투로 외쳤다. 맞는 말이었다. 백화점 광고업계에서는 그래도 시연이 알아주는 배트랑 이었다. “후후! 그거야 우리가 신영그룹에 있을 때 말이지! 과연 그룹을 그만둔 지금 와서 광고업계가 우릴 순순하게 받아 줄까? 더구나 나 같은 경우엔 소문도 나쁘게 났는데 말이야.” “소문이 어때서! 그러지 않아도 윤재형이 천하의 바람둥이였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항이잖아. 너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후후! 아니야! 사람들은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해. 없는 것도 살을 붙이는 세상인데 이런 좋은 안줏감을 가만 두겠어? 모르긴 해도 술자리에 내 이야기가 빠지지 않은 안주일걸?” 시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연화가 그만 입이 다물어졌다. 시연의 말이 모두 맞았던 것이다. 연화가 다시 물었다. “그럼 앞으로 뭘 할 거야?” “후후! 확 시집이나 갈까? 날 좋다고 하는 놈이 있기나 할까?” “지랄! 정말 시집이나 갈 년 같으면 이렇게 걱정을 하지도 않겠다! 망할 년!” 연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시연을 노려봤다. 시연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히히! 너무 걱정 마! 그래도 지구는 정상적으로 잘 돌고 있어!” 시연은 매운 고추장 양념을 찍으며 곱창을 어기적거리며 씹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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